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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삽시다. 

@love_yc1ear 

 

 

 

 

  [오늘 점심~]

   └ 이택언: 이런 게 점심이라고요?

   └ 유연: 거 좀 대충 삽시다.

 

 

 

 

 간단한 샌드위치 사진과 함께 올린 모멘트엔 금방 댓글이 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또 이택언이다. 무슨 일 하나 허투루 하는 법이 없는 이택언 대표님이니까, 내 간단한 식사가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지. 샌드위치를 우적 씹어 먹으며 답을 달았다. 거 좀 대충 삽시다. 옛날에는 이런 거 하나하나에 득달같이 달려들고 싶었는데(감히 생각한 만큼 달려들진 못했지만), 요즘엔 그냥 전부 이택언 대표님 성정이려니 한다. 달려들 기력도 없는데다가, 이런 말에 하나하나같이 예민하게 반응하면 나만 힘들 뿐이다. 인생 뭐 있나. 대충 사는 거지.

 

 

 

 이택언이야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본인처럼만 사냐고요. 세상 사람들 전부 이택언 될 일 있나. 이택언같은 삶의 방식이 쉬웠으면 이번 분기 연모문고를 휩쓸고 있는 <이택언처럼 사는 법 -계획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라->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지도 않았을 거다. 혀를 쯧쯧 차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촬영에 들어갈 시나리오를 훑어보았다. 이미 다 외울 정도로 닳고 닳게 본 시나리오지만 촬영 들어가기 전 마지막 점검은 필수다. 오늘의 분량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니 매끄럽게 나오는 게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안도에 마음을 놓은 것도 찰나, 촬영에 들어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약간 남아 있었음으로 태블릿 pc를 꺼내 새로운 기획안을 만지기 시작했다. 자투리 시간을 잘 활용하지 않으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일을 전부 감당할 수 없다. 정신없이 문장을 다듬고 있는데 스태프가 촬영 시간이 되었다며 부르러 왔다. 저장버튼을 누른 후 간이의자에서 일어나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촬영은 생각만큼 진전이 빠르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영상과 배우의 연기가 잘 맞지 않았던 탓이다. 시간은 한정돼 있는데 진도는 멈춰 있으니 마음이 자꾸만 급해졌다. 이렇게 가다간 배우들이며 스태프를 들들 볶게 될 것만 같아서 촬영장에 짧은 휴식을 주고는 지나간 테이크를 보며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차분한 마음, 뜨거운 머리, 아니 아니지. 뜨거운 마음에 차가운 머리. 그리고…

 

 

  “여기 물이요.”

  “고마워요.”

“그림은 괜찮은 것 같은데, 조금 더 여유를 가지셔도 될 것 같아요.”

 

 

  물이랑. 또 옆에서 좋은 조언을 해 줄 스태프다. 냉수를 들이킨 뒤 다시 보니까 괜찮은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내 생각이랑은 다른 그림이지만 나름대로의 매력이 충분한 그림이라는 뜻이다. 눈을 빛내며 화면을 집중해 보고 있으니 옆에서 한 마디가 더 날아온다.

 

 

  “너무 그렇게 열심히 안 하셔도 아무도 안 잡아먹어요.”

 

 

  그, 우리 회사 최대 투자자가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닌데. 그 사람은 나를 뼈째로 집어 삼키고도 남을 사람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스태프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 이택언 얘기 꺼내서 또 다른 초 칠 일 있나. 네. 알아요. 그런데 자꾸 조급해져서요. 몇 마디를 나누고 조금은 여유를 되찾아 물렁한 마음을 가지고 촬영에 들어갔다. 이택언이 그랬다. 일할 때는 탄탄한 신념 위에 유연한 사고를 세우라고. 그러니까, 일하는 거니까 그의 조언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의 말을 되새기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택언이 옆에서 한 마디씩 건네주는 말은 화제의 베스트 셀러인 이택언 어쩌구보다 훨씬 많은 도움이 된다. 절대 그 책을 시간 짜내가지고 삼 독 정도 해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스태프들이 각자의 자리에 위치하고, 배우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로는 촬영이 물 흐르듯 흘러갔다. 원하는 그림에 심금을 울리는 연기는 영상의 완결성을 보장해줄 것이다. 공개된 후 작품의 반응이 뜨거울 것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홍보 빡세게 돌려서 다른 투자 유치해야지. 즐거운 상상에 입가에 미소가 덧그려졌다.

 

 

 

 

 

 

 

 

  촬영장 안을 ‘수고하셨습니다.’ 하는 인사말이 가득 채웠다. 지지부진했던 오늘의 촬영은 어느 기점을 시작으로 급물살을 타고 흘러갔다. 아름다운 장면들이 카메라 필름을 꽉꽉 채웠다. 진도도 확실하게 뺐다. 화기애애한 촬영장 분위기에 내 마음도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만족할만한 시간을 보냈으니 오늘은 스스로 상을 줘도 될 것 같은데. 집 가자마자 옷 벗고 침대 들어가서 누워가지고 귤 까먹어야지. 쌓여있는 빨랫감과 설거지거리는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이 순간 스쳐지나갔지만, 그 일들은 주말에 어떻게든 될 것이다. 밥은… 대충 사가지고 들어가자. 좋아. 퇴근 후의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 제갈공명이 와도 나를 무너뜨리진 못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대표님, 오늘 촬영 잘 끝난 기념으로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시죠. 요 앞에 맛있는 집 있대요.”

 

 

 

  남은 스태프들 몇 명이 의기투합을 했는지 조르르 와서는 술을 마시러 가자 조른다. 조르지 말아주세요. 오늘을 마무리할 완벽한 계획이 이렇게 무너지다니. 허어, 안 돼. 어색하게 웃고만 있으니까, 옆으로 와 휙 팔짱을 낀 스태프가 나를 연행하듯이 촬영장 바깥으로 끌고 나왔다. 그 뒤로 까르르 웃는 소리들이 들렸다. 촬영만 끝나면 내가 쉽지 아주. 그래도 내가 대표인데. 눈을 흘기면서도 입가에 어쩔 수 없는 미소를 걸고 자의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몇 걸음 가기도 전에 툭. 탄탄하고 매끄러운 무언가에 부딪혔다. 아이, 뭐야. 하고 고개를 드니까 쭉 길게 뻗은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뒤로 저무는 해가 둥그런 빛으로 고리를 만들어 남자에게 후광을 비추었다. 이내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언짢음이 들어있었다.

 

 

 

  “내가 그 앞 안 보고 걷는 습관 좀 고치라고 했죠.”

  “어… 이택언 대표님?”

 

 

  갑자기 등장한 이택언의 모습에 굳어져 그를 불렀다. 당황한 내 모습은 신경도 쓰지 않는 건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이택언이 나랑 내 뒤의 스태프를 흘깃 보더니 물어왔다.

 

 

  “어디 갑니까.”

  “어, 촬영을 잘 마쳐서… 같이 술 마시러 가기로 했는데요. 대표님은 여기 웬일이세요.”

  “당신이 또 끼니 대충 때울까봐서요.”

 

 

  이택언은 팔짱을 낀 채로 손가락을 팔뚝에 톡톡 두드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찾아온 걸 보니 내가 그에게 남긴 답이 그의 심기를 거슬렸던 게 분명하다. 등골이 짜르르 오싹하게 떨려왔다.

 

 

  “에이. 일 할 때는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잘 아시면서.”

  “나는 모릅니다만.”

 

 

 

  과장해서 장난스레 웃어봤지만 이택언의 목소리는 아주, 아주 단호했다. 누가 보면 법정에서 판결이라도 내리는 줄 알겠어. 갑작스레 찾아온 그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스태프 하나가 스르륵 팔짱을 끼고 들어와 우리 사이를 살폈다. 그제야 그들을 잊고 있었단 게 생각났다. 뒤를 돌아보며 음흉한 눈빛을 하고 있는 스태프들에게 떽, 하고 아니란 눈빛을 강렬하게 보내봤지만 헛수고였다. 그들의 광대가 더 올라갔으니까. 한숨이 푹 나왔다. 그들 사이에서 행동대장을 맡았는지 외향적인 스태프 하나가 겁도 없이 이택언에게 말을 던졌다.

 

 

  “저희랑 같이 가시는 게 어때요?”

 

 

  이택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좋아요. 대표님. 그겁니다. 어서 아니라고 해요. 제발요. 이런 데 싫어하시잖아요. 이택언의 입에서 에둘러 나올 나올 ‘괜찮습니다.’ 같은 거절의 말을 기다리며 뜨거운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이택언이 나를 흘깃 봐서 눈을 마주한 뒤 고개를 작게 끄덕이 주었다. 이택언이 입술을 가벼이 열었다.

 

 

 

  “좋아요. 함께 가도록 하죠.”

  “왜요?”

 

 

  내 입에서 흔하게 나오지 않는 새된 목소리에 이택언의 예의 그 눈빛을 내게 보냈다. 차가운 것은 둘째가라면 서럽고 반박을 받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띤 그 눈빛은 화예에서 보고할 때만 받아도 될 것 같은데요, 대표님.

 

 

 

  “그쪽 일행이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맞다 그랬지. 좋아요. 그래요. 갑시다.”

 

 

  어쩔 수 없다. 포기해야지. 금방 기세를 꺾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뭐 대충 같이 갑시다. 가 보죠. 제일 먼저 발걸음을 옮겨 무리의 선두에 섰다. 뒤에서 피식거리는 이택언의 엷은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지만 그런 데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그런데, 그 가게가 어디 있다고 했더라.

 

 

 

 

 

 

 

  겨우 찾은 술집에 들어가 자리에 둘러앉았다. 앉자마자 호기심 어린 여러 쌍의 시선이 이택언에게 직구로 꽂힌다. 그의 옆에 앉은 나까지 함께 뜨거운 눈빛을 받아 앞으로 일주일은 핫팩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까, 말까 하는 찰나에 스태프 하나가 손바닥을 짝 부딪쳤다.

 

 

 

  “아이고. 주문을 안 했네.”

 

 

 

  메뉴판을 받아 술 몇 병과 안주 몇 개를 시켰다. 그때까지 이택언은 말 한 마디 없는 채였다. 기분이 나빠진 건 아니겠지? 그러니까 누가 이런 데 위험하게 졸랑졸랑 따라오래요, 대표님. 쓰읍. 다들 안 보는 찰나에 몰래 눈을 흘기니까 어깨를 으쓱거린다. 생각만큼 기분이 상한 건 아닌가 보다.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테이블에 깔린 술은 스태프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소주와 맥주 어쩌고를 기막힌 비율로 타 젓가락을 쨍- 하고 치니까 농밀한 거품이 주르륵 올라온다. 언제 보아도 기막힌 광경이다. 제일 먼저 이택언에게로 잔을 내밀었다. 내가 탄 건 아니었지만 생색도 내 가면서.

 

 

 

  “우리 대표님은 이런 거 드셔보신 적 있으신가요. 매일 고급스런 와인만 드시잖아요.”

  “날 도대체 뭘로 보는 겁니까.”

 

 

  그가 눈을 가늘게 치뜨더니 한 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저기 대표님, 아직 우리 건배도 안 했는데요. 혹시 긴장한 건 아니겠지. 그렇지. 이택언이 그럴 리가 없지. 술을 앞에 두고 해버린 얼빠진 생각을 휘휘 날려 보냈다. 스태프 중 하나가 이택언의 행동을 보더니 흥미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와아아. 대.박 술 완전. 잘. 드시네요. 와하하. 그래서 우리 대표님이랑은….”

 

 

 

  그리고 이 말을 듣는데 겨우 이택언의 소개를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절대로 그들의 흥미를 불식시키고 주도권을 가지고 오기 위해서는 아니었고, 작게나마 술자리를 함께 하는 인연을 가지게 되었는데 제대로 소개하는 게 도리라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소개를 안 해드렸던 것 같네요. 다들 아시는 줄 알아가지구요. 미안해요. 요즘에 연모 문고만 가면 좍 깔려 있는 얼굴의 주인공이시고…”

 

 

 

  그제야 이택언을 알아봤는지 눈이 휘둥그레진다. 뭐 이런 자리에 오리라곤 생각도 못 했던 사람일 테니까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이 눈빛을 교환하고는 또 음험함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나를 주시하는데, 이 오해를 도대체 어떻게 풀어야 하지. 곤란함에 술이 막 땡겨 오네.

 

 

  “또, 저희 회사의 가장 큰 투자자이신 화예의 이택언 대표님이세요.”

 

 

  일단 하던 말은 마쳐야 했다. 문장을 끝내자마자 와아아, 하는 의례적인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이택언이 작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더니 ‘이택언입니다.’하는 인사말을 건넸다. 시킨 안주가 하나둘씩 나오고, 다들 힘들었던 오늘 촬영에 이택언에 대한 관심보다 안주를 어디로든 넣고자 하는 배고픔이 더 큰 모양인지 젓가락을 바쁘게 놀리며 술과 음식을 입에 넣기 바빴다. 스태프들의 모습에 픽 웃으며 술로 목을 축였다.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술 적당히 마셔요.”

  “네, 네, 대충 마실게요.”

 

 

 

  술은 잘 못 마시지만 강요받지만 않으면 적당히 주량 맞춰 조절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 짱은 이택언 다음으로 나였고. 적당히 달아오른 분위기에 동화돼 적당히 마실 수 있다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의 말을 들어 넘기며 젓가락을 놀렸다. 테이블 위에 시켜두었던 술은 금방 동이 났다. 이모! 여기 술 좀 더 주세요! 하는 말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다들 안주를 입에 넣어 배를 불리고는 여유가 생겼는지 슬슬 이택언에게로 화살을 돌려서, 제 페이스따라 술을 마시던 이택언에게 자꾸만 원샷을 강권했다. 옆에서 보기엔 그저 미친 짓이었지만 이택언이 곤란해 하는 기색 없이 술을 받아 마셨기 때문에 딱히 스태프들을 말리지는 않았다. 지금 스태프들도 취해서 저러고 있는 거니까, 이택언도 이정도는 봐 줄, 봐, 봐… 뭐였지. 그래. 봐 줄 건가?

 

 

 

 

 

  다들 취해가지고는 젓가락 떨어트리고 화장실도 못 찾고 그중 한 명은 소주병이랑 얘기 하고 다른 한 명은 테이블에 너저분히 누워 자고 있는데 갑자기 울분에 찬 술냄새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은, 너무, 일을, 네? 너~무, 네? 열심히. 하신다고요.”

“맞아. 진짜. 대표님. 좀 적당히 좀 하세요. 저. 몸이 아작, 아니. 안 남아난다고요.”

 

 

  일을 열심히 했다는 게 지탄받을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이건 악성 루머다.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이택언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내가 알기로 모든 일에서 완벽어쩌고를 추구하는 가장 대단한 사람이니까.

 

 

  “에헤이, 씁. 제가 네? 이택언 대표님만 할까요.”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택언이 마시던 술잔을 깨끗하게 비우고 테이블에 내려놓는 소리였다. 이택언이 날 본다. 어두운 실내 안에서도 번뜩이며 빛나는 눈동자에 몸이 짜르르 떨려왔다.

 

 

  “일은 그렇게 하면서. 밥은 왜 그렇게 안 챙겨 먹습니까?”

 

 

  그리고 그의 말에 맥이 탁 풀린 건 나였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택언은 뭘 모른다.

 

 

  “일만 열심히 하면 됐지. 다른 거엔 신경 쓸 기력 없어요. 내 에너지는 한정돼 있고, 일에 쏟으면 다른 거엔 못 쏟는단 말예요. 어쩔 수 없는 거라고요.”

  “그래서 매일 늦잠이나 자고요?”

  “대표님이 너무 일찍 일어난다는 생각은 안 하나 봐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 법이니까요.”

  “에, 전 그냥 저대로 살면 안 되나요. 저는 새가 아니거든요. 일은 열심히. 대신에 연애 대충. 밥 대충. 청소 대충. 정리 대충. 설거지도 대충.”

 

 

 

  내 말에 이택언이 눈빛에 마뜩찮음을 가득 담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모양새다. 또 설거지 쌓아놨습니까? 예? 아니 대표님. 이 좋은 날. 이 좋은 술 마시면서. 꼭 그런 이야기를 하셔야겠나요. 술이나 드세요. 그의 앞에 술을 쓱 내미니 혀를 쯧쯧 차면서도 잘 받아 마신다. 아이고, 우리 대표님. 술 잘 드시네요. 역시 대표님은 못 당해내겠어요. 헤헤. 하고 웃으니까 안 그래도 진한 눈빛이 더 짙어진다. 내게 타박 섞인 어리광을 부렸던 이들은 둘끼리 의기상투를 해가지고 짠짠거리며 술잔 부딪치는 소리를 계속 냈다. 또 언제 이러겠냐, 실실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근데 화장실이 어디더랑. 늘어진 목소리에 저어―쪽이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턱턱 끄덕이고 물 먹은 것처럼 무거운 다리를 옮겼다. 아니, 물 아니고 술을 먹어서 이런 거구나. 하여튼.

 

 

 

 

 

  화장실을 갔다가 몰래 바깥으로 나왔다. 머리가 어지러운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찬바람 좀 쐬고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었다. 술집 골목으로 들어와 높이가 좀 있는 턱 위에 척 올라가서는 알코올 비린내 가득 섞인 숨을 후 내뱉었다. 손으로 양 뺨을 짝짝 두들기며 술기운이 날아가길 빌었다. 아까 뭐 실수한 건 없겠지. 그나저나 요 위에 올라와 있으니 이택언 생각이 난다. 별 건 아니고, 이 위에 올라와봤자 이택언 키도 안 될 텐데, 하는 안타까움 서린 생각이었다. 나도 키 좀 클걸. 어릴 때 안 크고 뭐 했지. 휴, 하고 숨을 폭 내쉬는 사이로 터벅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시선 아래로 보인 반들반들하니 윤나는 구두가 골목 사이로 스며든 큰길가의 주홍빛 가로등 조명을 받아 붉게 비쳤다.

 

 

 

  “어어, 대표님.”

  “연애하는 사람 있습니까.”

 

 

  반 정도는 붉게 반 정도는 어둡게 보이는 이택언이 더도 덜도 말고 딱. 간단한 질문만을 해 왔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은 없는데요. 언제든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또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라.”

  “음. 그렇군요. 그런데 미안하게 됐네요.”

  “뭐가요?”

  “연애 대충이라면서요. 나는 당신이 알다시피 뭐든 대충 할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내가 취했는지 이택언이 취했는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겠지. 다시 그를 향해 물었다.

 

 

  “저랑 하시게요?”

 

 

  이택언이 입꼬리를 느슨하게 끌어올린다. 골목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주홍빛이 괜히 그를 더 잘생기게 만든다. 주홍색이 아지랑이처럼 이택언의 주변을 너울거렸다. 멍하니 그를 보고만 있으니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당신 괜찮으면 하는 거고 아니면 기다리는 거지 뭐.”

  “흐으음. 제가 뭘 보고 대표님이랑 연애를 해요.”

 

 

 

  흐음, 하면서 생각 없이 말을 던지는데 천천히 열리는 이택언의 입술이 보였다. 아, 맞아. 저게 있었지. 배시시 잔뜩 달아오른 미소를 짓고는, 이택언의 아랫입술을 잡아 물었다. 턱 위로 올라온 건 잘한 행동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입술에 닿지도 않았을 건데, 딱 까치발을 드니까 이택언의 입술에 부딪칠 정도가 됐거든. 그의 입술을 혀로 핥아 보니까 살짝 굳어 있던 연한 살이 이내 부드럽게 풀린다. 엷은 웃음을 숨과 함께 뱉고는 입술 사이로 집어넣었다. 말캉거리는 부드러운 혀가 마중을 나오더니 간을 보듯 인사한다. 자꾸만 간질거려서 애가 탔다. 히잉…. 잇새로 흘러나온 말에 픽,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어렵게 잡고 있는 남자의 셔츠깃이 꾸깃꾸깃 구겨진다. 입꼬리가 흘깃거리며 올라갔다. 까치발을 계속 들고 있는 게 어려워 탄탄한 나무 같은 남자에게 매달렸다. 생각하는 것만큼 쉽게 자신을 내어주지 않던 이택언이 금방 전략을 바꾸어 나를 침략하려 다가왔다. 구강을 농락하러 온 따뜻하고 질척이고 말캉한 분홍빛 살덩이를 마주한 순간, 정신을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산소가 부족해져서 그런지 몰라도 머리가 점점 어질어질했다. 분명 타오르는 불 속에 있었는데 끈적거리는 물소리가 들리는 건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숨 쉬어요.”

 

 

  듣기 좋은 남자의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숨을 후 뱉었다. 따뜻하고 약간은 비린 알코올 향취가 피부를 간질거린다. 이택언이 쿡쿡 웃었다. 왜―웃어요? 그냥요. 혀가 꼬여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은 나와 달리 이택언은 생각보다 또박또박 음절을 말하고 있었다. 괜한 치기가 동해 다시 입술을 부딪쳤다. 꾹 누른 입술은 말랑거렸다. 이택언은 입술 각질 관리도 받지 않을까? 잡생각을 하는 걸 알았는지 윗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문 이택언이 다시 혀를 다급하게 넣고는 입술 안쪽을 농락했다. 간질거리고, 말캉거리고, 몰랑거렸다. 기분 좋은 느낌에 다시 그에게 매달리려고 했는데 이택언은 금방 제 혀를 거두어들였다. 아쉬움에 입술이 쭉 튀어나왔다. 이택언이 이마를 맞대왔다. 숨을 후 내쉰다.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들렸다.

 

 

 

  “대충하는 키스도 나쁘진 않네요.”

  “대표님의 대충이랑 제 대충이 많이 다른 것 같진 않나요.”

 

 

  웃음기와 함께 숨이 차올라 헐떡이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마를 마주하고 있던 이택언이 손으로 입술가에 묻은 타액을 훔쳤다. 턱 위에 올라와있는 나보다 족히 십 몇 센치는 더 큰 이택언이 나른하고 여유로운 웃음을 함빡 짓는다.

 

 

  “열심히 하는 건 얼마나 좋을지 또 궁금하진 않습니까.”

 

 

  내 눈은 오갈 곳 없이 흔들렸다. 결국에 그를 보게 되리란 걸 이택언은 알았을지도 모른다.

 

 

  “약간 궁금해요.”

  “그럼 당신 늘 하는 것처럼 대충. 날 시험하는 거라고 생각해 봐요.”

  “대표님….”

 

 

  마주한 이마를 떼고 제대로 서서는 이택언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혀로 입가를 핥았다. 본능적인 탐욕이 찌릿하게 등허리를 타고 오른다.

 

 

  “그럼 한 번만 더 해주세요.”

  “원하신다면.”

 

 

 

  느른한 웃음을 짓는 이택언이 잘생겼다. 술을 마셔서도 아니고 조명을 받아서도 아니다. 나는 이 남자가 잘생긴 것도 대충 하지 않는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런. 꼭 내가 진 것 같잖아. 그러나 음흉한 눈빛을 보내던 스태프들은 전부 술에 취해 있었다. 지금 내 앞엔 이택언밖에 없고, 이택언 앞엔 나밖에 없다. 눈썹을 들썩이며 만족감에 가득 차오른 표정을 지은 이택언이 제 품으로 단단히 나를 옭아맨다. 기대와 긴장에 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눈 감아요.”

 

 

 

 

  그의 말에 다시 눈을 감고 찾아드는 입술을 맞았다. 이게 이렇게 좋을 줄 누가 알았겠어. 아, 아빠. 대충 사는 삶은 생각보다 좋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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