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 나보다 커진 너의 키
@LP__SPRING
“이것 봐. 이번에는 내가 너보다 좀 더 큰 것 같으니까 내가 이겼는데?”
“거짓말 하지 마.”
“진짜야. 여기 파란색은 내 키, 흰색은 네 키잖아.”
“…….”
소년의 얘기에 소녀는 한껏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짙은 회색의 벽 면 한 쪽에는 흰색과 파란색의 분필 자국이 가득했다. 자국의 높이는 매년마다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파란색이 좀 더 높다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놈을 잠깐 쳐다보다 입술을 삐죽 내밀며 휑하니 돌아섰다. 등 뒤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로 돌아갔다.
‘…연아.’
‘…….’
‘이대로 가면 이제 영영 못 보는 거야?’
‘아니야. 아빠가 그랬는데, 간절히 원하면 나중에 다시 볼 수 있다고 했어.’
잠깐 눈 깜빡하는 사이에 장소가 바뀌었다. 두 사람의 키는 그때에 비해 조금 더 커져있었고, 회색 벽 면 한 쪽에는 더 이상 분필 자국이 칠해지지 않았다. 소녀의 두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소년은 애써 울음을 참고 있는 듯 했다. 아빠의 말을 빌리자면 아주 잠깐 떨어져 있는 거라고 했다. 너희 둘은 나중에라도 어떻게 해서든 만나게 될 운명이니 아주 잠깐만 떨어져 있으면 된다고 했다.
소녀가 발을 돌리고 멀어지는 걸음 너머로 소년이 소리쳤다.
내가 너, 찾으러 갈게. 그러니까 기다리고 있어.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는지 굳이 세지 않았다. 계절이 몇 번이고 바뀌는 동안에 소년의 키는 훌쩍 자랐다. 소녀가 떠난 후 남겨진 소년은 홀로 짙은 회색 벽면에 파란색 분필로 키를 체크했다. 파란색 분필 자국 옆에는 흰색 분필 자국도 함께 있었지만, 흰색의 높이는 여전히 낮았고 앞으로도 낮을 것이다. ……너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기락아. 주기락!”
매니저는 분주하게 기락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찾았다. 곧 있을 녹화 방송 때문에 서둘러 준비를 끝내야하는 상황인데 어딜 갔는지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매니저는 익숙하게 기락의 핸드폰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흘렀지만, 전화는 불통이었다.
“주기락씨, 스탠바이 해주세요.”
“아, 네!”
매니저는 초조한 마음으로 기락이 연락을 받기만을 기다렸다.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는 B의 무대가 끝나면 다음 순서다. 기락의 무대는 녹화 방송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양해를 구해 순서를 마지막으로 미뤄도 된다 하더라도 방송국에서의 일은 기본적으로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지금과 같은 상황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아무리 기다려도 기락의 모습은 커녕, 연락도 받지 않는 것 같아 스태프에게 순서를 마지막으로 미룰 수 없겠느냐고 양해를 구하러 가려던 찰나였다. 형, 뭐하고 있어? 다음 내 순서인데 왜 말 안 해줬어. 저 멀리서 기락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매니저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치, 햇살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기락이 서둘러 무대 위로 올라갔다.
심장을 울리는 커다란 음악소리와 함께 팬들의 함성소리가 한데 뒤섞여 스튜디오 너머로 들려온다. 우리 다음 주에도 꼭 봐요. 잘 가요. 기락의 마지막 인사말이 들리고 나서야 매니저는 겨우 한시름을 놨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스케줄은 뭐였더라. 재킷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 스케줄을 확인했다.
“형, 다음 스케줄은 뭐야?”
“신곡 발표랑 관련된 인터뷰. 이것만 하면 오늘 스케줄도 끝났네.”
“으아~ 드디어 끝이 보이는 구나.”
“그나저나 무대 하기 전에는 어딜 그렇게 다녀온 거야? 전화해도 받지도 않고. 녹화 펑크 내는 줄 알고 얼마나 초조하게 기다렸는지 알아?”
미안, 미안. 잠시 어디 좀 들렸다가 왔어.
기락은 매니저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자신이 그토록 찾으러 다녔던 소녀를 찾았다는 것은 비밀에 붙여야겠다. 인터뷰가 진행될 장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매니저의 잔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디에 갔다 왔느냐, 무얼 했느냐고 묻는 질문이 절반이 넘지만. 주기락은 매니저의 질문에 어떤 것들도 답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기락은 애꿎은 제 손바닥을 주먹처럼 가만 말아 쥐었다가 펴길 반복했다. 손바닥에 남겨진 따스함이 아직 남아있는 느낌이다.
녹화방송이 진행되기 30분 전, 매니저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간식을 몰래 사서 숨겨둘 요량으로 방송국 근처의 편의점에 들렀다. 요 근래에 감자칩 제품에서 나오는 히어로 카드를 모으고 있거니와 카드 한 두 장만 더 모으면 모든 히어로를 다 모으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고지가 당장 코앞에 있었기에 매니저의 눈을 피해 아주 잠깐 편의점에 들르기 위해 완전 무장을 하고 방송국을 나서 편의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앗, 마지막.”
감자칩은 마지막 하나였고, 감자칩을 잡은 손은 자신과 또 다른 누군가의 손이 함께였다. 순간 기락의 표정은 울상이었지만, 다른 누군가가 양보해서 겨우 살 수 있었다. 고맙다며 인사를 하기 위해 쓰고 있던 마스크를 살짝만 내렸을 뿐인데 상대방이 무척 당황해하는 것이 역력해보였다.
“주, 주기락?”
“쉿. 매니저 몰래 나온 거라서 여기서 팬들한테 들키면 큰일 나요.”
“…….”
상대방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깜짝 놀란 시선으로 주기락을 쳐다봤고, 그는 그저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기락이 고맙다며 인사를 하려던 찰나에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조금 바뀌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린 시절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았다. 상대방은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한 눈치였지만.
“비밀 지켜줘서 고마워요. 조만간 또 만날 일이 있었으면 하네요.”
“아, …네.”
매니저 몰래 사온 과자는 다행이도 들키지 않았지만, 입 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가는 것은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뭐가 그리 좋다고 웃고 있냐.”
“으응, 그냥.”
“인터뷰만 하면 오늘 스케줄 끝이니까, 인터뷰도 힘내서 얼른 해버리자.”
“알았어.”
기락은 인터뷰 장소에 도착한 후, 한 번 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방금 전 편의점에서 마주쳤던 사람이 있었다.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어 “어?” 하고 아는 척을 했다가 매니저의 눈치를 받아야만 했다. 인터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인터뷰 할 때 물어볼 질문들 중에서 답하기 곤란하거나 애매한 질문들은 미리 다 빼기 때문에 사전에 질문을 미리 알려주고, 거기에 맞춰서 준비된 답변을 하면 되기 때문에 기락의 입장에선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에 컵 안에 가득 들어있던 얼음들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빨대로 커피를 휘휘 저으며 인터뷰를 진행했고, 컵 밑바닥이 훤히 드러나기 시작했을 즈음에 인터뷰가 무사히 끝이 났다.
“그나저나 너 아까 저 사람보고 깜짝 놀라더니 아는 사람이야?”
“아, 그게…….”
기락은 새삼스럽게 매니저의 눈치를 살폈다. 매니저에게 잠시만 인사를 하고 오겠다며 작게 얘기한 후,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나를 기억 못하겠지.
“…어, 안녕하세요.”
“허니칩씨.”
“……허니칩?”
“아, 애칭이에요, 애칭.”
기락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만의 애칭을 붙이며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갑작스럽게 ‘허니칩’이라는 애칭이 생긴 유연은 당황스러워했다. 게다가 이름도, 얼굴도 아주 많이 알려진 유명 아이돌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연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기억 못하는 모습 보니까 조금 섭섭한 건, 어쩔 수 없네.”
“기억을, 못해요? 내가? 주기락씨를?”
아까 편의점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옛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자, 기락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애써 그럴 필요 없다고 말렸다.
“허니칩씨는 억지로 떠올릴 필요 없어요. 내가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서 너무 기뻐요. 나중에 또 만나요.”
유연은 자신에게 의미모를 말만 남긴 채 떠난 기락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기락이 말하는 뉘앙스는 과거에 분명 아는 사이인 듯 했다. 하지만 제 기억 속에는 기락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짙은 안개가 드리운 것 같다.
“주기락 아녜요? 요즘 인기 아이돌이잖아요.”
“근데 주기락이 왜 대표님한테 아는 척을 하는 거죠?”
“그러게.”
인터뷰에 함께 참여한 작가와 리포터가 쪼르르 옆으로 다가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유연은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멀어지는 주기락의 뒷모습을 가만 쳐다보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제법 익숙한 모습이다. ……누구였더라,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우리,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 만날 수 있어.’
‘네가 나를 기억 못해도, 내가 너를 기억할게.’
‘…….’
‘나중에 내가 찾으러 갈게.’
기억의 파편들이 조각난 지 오래다. 희끄무레한 벽과 알 수 없는 고약한 냄새가 가득 퍼진 실험실정도만 기억난다. 각 방마다 햇빛 한 줄기가 겨우 들어올 수 있는 작은 창문과 침대, 책상, 의자가 전부인 곳. 유연의 기억 속에 있는 그 곳은 어린 시절 아빠를 따라 자주 찾아갔던 곳이었다. 잘 기억은 나지는 않지만, 실험의 규모가 커져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실험을 이어갔다는 이야기를 아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퀴퀴하고,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마주쳤던 한 소년이 있었다. 노란색의 머리칼과 푸른색의 눈동자를 지닌 아이는 무척이나 이국적인 외모와 분위기를 풍겼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이 곳에 들어오면 다들 표정이 어두워지고 힘들다는 얘기를 버릇처럼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소년은 어째서인지 전혀 힘들어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부러 표정을 숨기는 것인지, 아니면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건지.
아빠 손을 잡고 종종 오는 연구소이지만 이 곳은 퀴퀴한 냄새가 심해 건물 안으로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럴 때면 건물 뒤쪽에 있는 공터에서 주로 시간을 보낸다. 실험실에서 지내고 있을 아이들을 위해 준비했다던 작은 놀이터가 있어, 연구소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날에는 이 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한쪽 벽면에는 언제부터 그려졌는지도 모를 작대기가 몇 개 그어져 있는 것이 전부였다.
“음, 이쯤인가.”
유연은 자연스럽게 하얀색 분필로 자신의 키를 파란색 분필 자국 옆에 그렸다. 그래도 파란색을 넘지는 못하네. 유연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울상이야?”
“내 키는 빨리 크지 않는 것 같아서, …속상해.”
유연의 투정을 가만 받아주던 기락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우리 한 달에 한 번, 이 곳에서 서로의 키를 재보는 거야.”
“……응.”
“내 키는 파란색, 네 키는 하얀색. 내가 이 하얀색을 넘으면 너는 내 소원을 들어주고, 반대로 네가 이 파란색을 넘으면 내가 네 소원 들어줄게.”
기락의 제안에 유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 그렇게 두 사람은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서로의 키를 재고, 서로의 소원을 들어줬다. 그렇게 세 번째 여름이 다가오던 늦봄의 어느 날이었다.
“……오늘따라 늦네.”
기락은 연구소의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유연을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은 밤, 기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오지 않는 건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고, 다시 연구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찰나,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기락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내가 늦어서 미안해.”
“나는 네가 안 오는 줄 알았어.”
“…….”
유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연구소에서 실험을 당하고 있는 아이들이 조금씩 사라짐과 동시에 정부에서 초능력과 관련된 실험을 전면 금지 시키겠다고 발표가 난 지금, 더 이상 연구소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아빠는 뉴스를 보며 크게 낙심한 표정이었고, 더 이상 소년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슬퍼졌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가보면 안 되겠냐고, 약속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겨우 허락을 받아 연구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었구나?”
“……응.”
“괜찮아. 내가 너 찾으면 되니까.”
기락은 유연에게 그리 얘기하며 환하게 웃었다. 유연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함께 어울린 지 3년 남짓 지났는데 막상 이렇게 헤어지게 되다니. 이별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모든 이별이 슬프고 속상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이별은 더욱 심하다.
“아직 소원도 못 들어줬는데…….”
“아, 그거. 나중에, 아주 나중에 내가 너 찾으면 그때 내 소원 들어줘.”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다. 꼭 지키겠다는 말과 함께.
창문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눈부신 아침 햇살에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모처럼 미래를 내다보는 꿈이 아닌 과거의 꿈을 꿨다. 어딘지 모르게 그리운 사람이 꿈속에 나타났다. 금발의 벽안. 환하게 웃는 모습이 꼭 태양 같았다. 그래서 함께 실험을 하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태양신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아이였다. 그 모습이 꼭…….
“……주기락 닮았네.”
……. 어? 그러고 보니. 유연은 가만 생각에 빠졌다. 금발과 벽안. 햇살 같은 눈부신 웃음. 태양신이라는 애칭. 이 모든 것들이 똑같은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떻게 그 사람을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던 걸까.
[잘 잤어요? 오늘 하루도 힘내요!]
아무래도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것이 빠를 것 같아 외출 준비를 하고 있던 중에 문자 알림이 울렸다. 잠금을 해제하고 메시지를 읽으니 주기락이라는 이름과 함께 짧은 내용이 전부였다.
[지금 잠시만 만날 수 있어요? 할 얘기가 있어요.]
[그래요. 그럼 U오피스텔로 와요.]
유연은 서둘러 외출 준비를 끝내고 문자로 보내준 주소를 찾아갔다. 찾아가는 동안 왜 이리 콩닥콩닥 심장이 뛰는지. 며칠 전에 인터뷰를 했을 때에는 이렇게까지 심장이 뛰지 않았는데.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에 가득 들어찰 때 카페 앞에 도착했다.
“와, 진짜로 올 줄 몰랐는데. 뭐 마실래요? 시원한 거? 따뜻한 거?”
“왜 얘기 안했어요.”
“무슨 얘기?”
“어린 시절에 우리 만난 적 있었다는 거요. 기락씨는 알고 있었죠?”
“그럼요. 나는 보자마자 알았는걸요. 얘기했잖아, 내가 찾는다고.”
유연은 왠지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먼저 알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애써 손등으로 아무렇지 않게 닦아내며 기락을 똑바로 쳐다봤다. 흐릿하게 자리 잡은 기억 저 너머 속의 기락의 모습과 지금의 기락의 모습은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차가운 컵 속에 담긴 얼음이 천천히 녹으면서 모양이 흐트러졌다. 컵 벽면에 물방울이 조금씩 맺혔다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애꿎은 빨대만 매만지며 컵 안에 든 음료를 휘휘 내저었다.
“아. 다시 만나면 소원 말한다면서요.”
“그랬죠.”
“그럼 그때 그 소원이 뭐였는지 얘기해봐요.”
유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락은 유연의 손목을 잡고 자신쪽으로 가까이 다가오게끔 살짝 잡아당겼다. 기락은 커다란 손바닥으로 유연의 두 눈을 가렸다. 유연은 갑자기 차단된 시야에 적잖이 당황해했다.
“뭐, 뭐하려는 거예요?”
“내 소원이니까 조금만 이대로 있어줘요.”
유연이 한 번 더 입을 열어 질문을 던지려고 할 때, 입술 위로 포개어지는 또 다른 감촉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 두 눈을 가리고 있는 손을 떼어내려고 해봤지만, 체격 차이에서 밀려 힘을 쓸 수 없었다.
잠시 맞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은 다시 포개어졌고, 한참이나 맞대고 있다가 유연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최대한 감정을 참으려고 하는 것이 맞댄 입술 사이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게 내, 소원이에요.”
“…….”
“나의 모든 처음을 허니칩씨에게 주고 싶었어요. 허니칩씨는 나와의 키스가 첫 키스가 아닐지 몰라도, 나는 첫, …키스거든요.”
양 볼을 붉히며 어색하게 웃었다. 유연은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기락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품에 안겼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 소리가 내 심장소리인지, 아니면 기락의 심장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기락은 조심스럽게 유연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려 방금 전의 입맞춤보다 훨씬 더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코끝을 간질이는 기분 좋은 향기에 푸스스 작게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감정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소년을 만나 키를 재는 것보다 그 아이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척이나 행복했던 시간이었다는 것을.
초여름의 밤이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