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로비 - 파티
@lillmnmilli
갑작스러운 전화였다. 유연의 귓가에 들리는 단어는 몇 가지 되지 않았다. 너무 당황했거나 갑자기 긴장했거나 혹은 둘 다였다. 파티, 파트너, 드레스, 중요한 자리, 중요한 사람들,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법한. 유연씨. 유연씨?
"유연씨."
"네, 대표님. 죄송해요. 듣고 있어요."
"그래요."
"네."
"당신 긴장했군요."
약간의 웃음기가 섞인 음성이었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만으로도 자연스럽게 기분과 상태를 알아차린다. 이 사람에게 숨길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네?"
"내 전화에 거의 집중하지 않았잖아요."
"네. 죄송해요."
당황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유연은 솔직하게 답했다.
"긴장 됩니까?"
"아뇨. 아니, 솔직히 네. 긴장 돼요."
제가 다그치기라도 할까 잔소리라도 할까 습관적으로 하는 답이 분명했다. 그러다간 이내 제 답을 주워 담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유연이다. 그는 그녀의 그런 솔직함을 귀여워하곤 했다.
"뭐가 걱정입니까. 내가 있는데."
그러게. 그러게요. 유연은 그의 음성에 천천히 평온을 찾았다. 그의 목소리는 그런 힘이 있었다. 자신만만한 음성이 유연을 침착하게 만들었다.
다시 한 번 설명하는 그의 말을 다시 찬찬히 귀담아들었다. 오늘 연락받은 파티에 급하게 참석하게 되었고, 유연이 파트너로 적합할 것 같아 곧장 연락을 했노라고. 그 사이 그는 많은 것을 알아봤겠지. 어떤 분위기의 파티이고, 어떤 사람들이 참석하고,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지. 기타 등등. 애초에 제게는 제안도 오지 않았을 파티이지만, 참가는 물론이고 그런 것들마저 그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가기 직전까지, 아니 문 앞에 도착해 그의 팔위에 손을 얹기 직전까지도. 어떤 사람들이 참석하고, 그들이 업계에서 어떤 위치를 갖고 있으며,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그리고 그들의 취향과 취미는 뭔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해주려 할 것이다. 마치 개인 비서처럼. 그처럼 대단한 사람을 비서처럼 부리다니. 유연은 전화를 끊으며 조금 웃었다.
"대표님."
기획안 보고를 위해 서류를 챙겨 유연의 앞에 다가온 고은을 보며 유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미안하지만 일이 생겨서 먼저 갑니다. 보고는 내일 받을게요."
"급한 일이세요? 안 좋은 일은 아니죠?"
"업무의 연장선. 파티에 참석하게 됐어요."
"파티요? 이렇게 갑자기?"
"그러게 말이에요."
유연은 웃으면서도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일 열심히 하시고, 여유 되시면 파티도 좀 즐기세요."
"그럴 수 있다면 좋겠네요."
수고해요. 유연이 사무실을 나서자 고은은 잘 다녀오세요, 하고 인사했다. 그는 벌써 아래에 와있을 것이다. 전화로 차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으니 제게 파티 얘기를 전하기도 전에 이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없기도 했거니와 거절하지 못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테니까.
주차장으로 내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비슷비슷한 차의 정렬에서 금방 그의 차를 찾아냈다. 자주 봐왔으니까, 익숙하니까. 유연을 발견한 그가 천천히 차에서 내려섰다. 유연은 시야에 길게 잡히는 그를 보며 심호흡을 했다.
그를 따라 차에 타 숨을 크게 마시자 이택언의 시선이 유연에게 닿았다.
"먼저 옷부터 고르죠."
"좋아요. 옷으로 어떻게든 자신감을 회복해보겠어요."
이택언은 의지를 다지는 유연의 표정이 귀여워 조금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웃음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저도 알아요. 옷으로 자신감을 회복하는 건 자기 자신에 자신이 없는 거고, 그런 얘길 하시려는 건 알겠지만 저는 정말-"
"예뻐요. 당신. 갖춰 입지 않아도."
유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 놀란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가끔 이렇듯 예상 할 수 없는 순간, 예상 할 수 없는 말로 자신을 들었다 놓는 이택언에 유연은 심장이 남아나지 않았다. 평소의 그와는 어마어마한 간극이었지만. 유연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가 차를 세운 곳은 대단히 화려하고 대단히 어마어마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깔끔하고 번듯한 외관은 쉽게 다가서기 어렵게 했다. 그를 따라다니면서 느낀 바로는, 이런 곳이 더 범접하기 힘든 곳이곤 했다.
"여기 자주 와보셨어요?"
"아뇨, 처음입니다."
그는 차분하게 문을 열어주며 유연에게 답했다. 그의 대답은 매우 간단했다. 언제는 그러지 않았냐마는. 그는 어디서나 익숙한 듯 자연스러웠다. 유연이 어려워하는 곳에서는 더더욱.
외관을 내부와 똑같이 옮겨놓은 곳이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직원이 따라 걷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마도 여성복 전문. 남성복이 없었기에 그는 처음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연은 그런 사소한 답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자신 때문에 이곳을 알아봐 두었을 테니까. 거기다 그 전에는 이런 곳에 함께 올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예약했습니다."
그의 간결한 말에 그들이 안내된 곳은 탈의실이 함께 있는 독립된 공간이었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옷을 고르고 입어 볼 수 있는. 이런 곳이 난생 처음인 유연은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두리번거리지 않도록 애써야만 했다. 이택언이야 이런 곳이 일상이겠지만.
오늘밤의 파티에서 실수하지 않기 위한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을 꾹 닫고 그의 뒤를 따라 걷다가 그가 멈춰 서자 덩달아 보폭을 좁히며 멈춰 섰다.
"몇 벌 골라달라고 부탁해뒀습니다만. 그래도 몇 번은 갈아입어봐야 할 겁니다."
그 말과 함께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필요하다면 늘릴 수도 있지만요."
그녀가 번거로울까 염려하는 모양이었다. 이택언은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말을 돌려했다. 고개를 끄덕인 유연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탈의실로 안쪽으로 사라졌다.
긴 의자에 앉은 이택언은 차분한 시선으로 탈의실 앞에 길게 쳐진 커튼을 쳐다보았다. 묵직한 무게의 벨벳 커튼이 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커튼이 열리고 나오는 한 사람을 향한 기다림이었다. 몇 번인가 그녀의 파트너를 자청했던 그는 성장한 그녀의 모습이 얼마나 빛나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몇 분인가가 지나고 커튼이 열렸다. 분홍빛의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은 유연을 보며 이택언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항상 그의 상상을 넘어서곤 했으므로.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밝은 빛 아래 그녀의 걸음을 따라, 빙그르르 도는 움직임을 따라 춤을 출 가벼운 드레스는 분명 예뻤다. 손 안의 작은 오르골 안에서 춤추는 발레리나처럼. 하지만 오늘 같은 파티에는 이렇게 밝은 색보다는 검은색이 어울릴 터였다. 갈색머리를 틀어 올려 목을 드러내고 반짝이는 목걸이를 긴 목에 걸면 시선이 집중될 것이 분명했다. 걸음걸음마다 부드럽게 다리에 감겨 은은한 빛을 낼 검정 드레스를 보자 이내 자신의 옆에 설 유연이 그려졌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껴두어야 옳지만 그녀의 미래를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발레리나 같은 분홍색 드레스는 자신을 위한 선물로 하기로 하자. 이택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좀 전에 봐둔 검은 드레스를 집어 들고 다가갔다.
"이걸로 입어 봐요."
머뭇거리던 유연에게서 네, 하고 작은 대답이 샜다. 직원을 따라 탈의실로 사라지는 유연의 뒷모습을 보며 그제야 떠올렸다. 예쁘다고 말하는 것을 잊었다. 예의상 하는 말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예뻤으니까. 말할 기회를 놓쳤을 뿐이다. 유연의 앞에서의 이택언은 이택언답지 못했다. 해야 할 말을 잊고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는 눈 한쪽을 찡그리며 이마에 손을 댔다.
홀로 탈의실을 나오는 직원을 본 것이 조금 전인데 유연이 나오지 않는다. 직원 역시 의아한 듯 그녀가 있는 탈의실로 들어가려했다. 그러나 그것을 발견한 이택언이 먼저 손을 들어 제지한 후 커튼을 살짝 열어 탈의실로 들어섰다.
"아, 이게...안 닿아서.."
유연은 등 뒤의 지퍼를 붙들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손가락 몇 마디만큼도 못 올라간 그것을 붙들고 인기척에 돌아선 유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직원이 들어온 줄 알았는데, 등 뒤에 선 사람은 다름 아닌 이택언이었다.
"대표님!"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추면서도 놀란 음성과 표정은 숨길 수 없었다. 제가 여기 들어온 것은 직원도 아는데. 당연하지만 이택언은 탈의실의 목적과 용도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가요..!"
유연은 옷을 꼭 붙잡은 채 그를 밀어 탈의실에서 몰아내려했지만, 그는 밀리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택언은 놀란 유연을 모른 척 한 채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돌려세웠다. 그는 자꾸만 뒤를 돌아 보려는 유연의 움직임에도 아랑곳 않고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댔다. 우아하게 끌리는 밑단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지퍼를 올렸다. 조용한 가운데 소리만이 선명해 유연은 뜻하지 않은 긴장감에 숨을 참았다.
이택언은 지퍼를 올리다말고 허리를 숙였다. 등 뒤로 커다란 그림자와 움직임이 느껴져 유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드러난 흰 등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매끄럽게 튀어나온 날개뼈에 입 맞추었다. 검고 흰 것의 확연한 대비. 이택언은 허리를 조금 세우고 목을 가린 갈색 머리로 손을 뻗어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를 차분하게 한 손에 그러모았다. 그는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희게 드러난 목덜미에 다시금 키스를 남겼다. 등에서 다시 목으로 올라가는 그 움직임이 더뎌 그가 시간을 멈춘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파티에 대한 두려움 대신 그로 인한 긴장감이 유연을 채웠다. 입술이 가볍게 떨어져나간 등과 달리, 이택언은 유연의 목에 잠시 입술을 대고 있었다.
"오늘 밤 다시 이 위에 키스하는 건 나여야 합니다."
당신을 내 옆에서 따로 떨어뜨릴 생각도 없지만.
속삭이는 말은 유연만이 들을 수 있는 음성이었다.
이택언은 손을 뻗어 유연의 허리를 감았다.
"예뻐요. 아름다워. 아깐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당신 이런 모습, 볼 때마다 놀라거든."
"거짓말.."
이택언은 그녀의 얼굴이 붉어져 있음은 굳이 돌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아 더 보고 싶었다.
"확인해볼래요?"
툭 떨어져있던 손이 등 뒤로 다가가 도로 지퍼를 내리려 들자, 유연은 파드득 놀라 몸을 돌리려 했다.
"아뇨!"
이택언이 이런 곳에서, 파티를 앞둔 그녀에게 그럴 리가 없는데. 유연은 어지간히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는 드러난 그녀의 어깨에 다시 입술을 찍었다. 그가 입술을 댄 채 웃어 유연에게도 그가 웃는 것이 느껴졌다.
"절 놀리는 게 재밌죠?"
"아니라곤 말 못하겠군요. 그렇지만 예쁘다는 말은 놀리려는 것도 거짓말도 아닙니다."
웃음기 없는 그의 말에 유연의 볼 끝이 조금 붉어졌다.
"오늘 파티에는 이 드레스로 해요. 파티 분위기에 이게 더 어울리거든. 먼저 입었던 건 나만 볼 수 있는 곳에서 날 위해 입어줘요."
"...그럴게요."
유연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의 방해도 없었다. 심지어는 시간마저도. 주위가 조용하고 오직 둘 뿐인 것 같아 시간이 멈추었는지 계속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누구의 생각인지는 가릴 필요가 없었다. 한 공간에서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으므로.